뉴스

내 고장 역사 교실 ⑦ 황보 인 묘와 월계단

입력 : 2015-01-12 14:17:00
수정 : 0000-00-00 00:00:00

 

세종의 유언을 받든 여섯 신하

계유정난으로 희생된 절육신

 

문산에서 법원리 방향으로 차를 몰고 가다 보면 선유리와 이천리(배내)를 지나게 된다. 파양초등학교 못 미처서 오른쪽으로 샛길을 따라 올라가면 황보 인 묘와 월계단이 나온다. 제대로 된 안내판이 없어서 찾기가 쉽지 않다. 

 

세종의 고명대신이 되다

황보 인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세종 때에는 김종서와 함께 북방 영토를 개척하고 방어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문종 때에 이르러 만인지상일인지하의 자리인 영의정까지 올랐다. 세종이 죽기 전에 황보 인, 김종서, 정분 등 여러 신하들은 세종의 유언을 받들게 되었다. 

“짐이 오래 살지 못할 것 같구려. 경들이 세자(문종)와 세손(단종)을 보필하여 나랏일을 잘 이끌어주시오.”

이른바 고명대신(임금의 유언을 받드는 신하)이 된 것이다. 세종이 죽고 세자(문종)가 왕위에 올랐지만 병이 들어 2년 3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그 후 12살의 세손(단종)이 즉위했으나 나이가 너무 어려 정치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신하들이 나랏일을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계유정난으로 목숨을 잃다

그러나 황보 인을 비롯하여 대신들은 임금을 능멸하면서 나랏일을 처리하지 않았다. 고명대신들은 대부분 국방과 외교, 토목 등의 분야에서 나라의 기틀을 다진 실력파 관료였다. 더욱이 불충하여 역모를 꾸미려는 의도도 없었다. 그런데 정치권력에 탐이 난 수양대군(세종의 차남이자 단종의 숙부)이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정변을 모의했다.

“오늘은 요망한 도적들을 소탕하여 종사를 편안히 하는 날이다. 내가 한두 명의 무사를 거느리고 곧장 김종서 집에 가서 목을 벨 것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렇게 해서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황보  인은 단종이 부른다는 허위보고를 받고 대궐에 입궐했다가 격살되었고, 김종서는 자신의 집 앞에서 격살되었으며, 정분은 낙안에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았다. 

 

300년 만에 복권되다

계유정난으로 희생된 신하들은 약 300년이 지난 영조 때에 이르러 복권되었다. 수양대군의 후손들이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큰 죄가 없었는데도 복권이 늦은 것이다. 복권 이후 황보 인 묘는 후손들이 관리해 왔다.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파주의 유림들이 계유정난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려는 움직임이 생겼다. 이렇게 해서 황보인의 묘역에 절육신(節六臣)을 추모하는 월계단이 세워졌다. 절육신은 계유정난으로 목숨을 일은 사육신(死六臣)과 벼슬을 버린 생육신(生六臣)에 견주어 후대 사람들이 붙인 것이다. 절육신에는 황보인, 김종서, 정분, 김문기, 민신, 조극관이 선정되었다. 

 

향토 유적 지정이 시급하다

역사 유물이나 유적은 대부분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지정하여 문화재로 관리한다. 문화 유적으로 지정을 받지 못하면 관리가 잘 되지 않는다. 후손들이 경제력을 잃으면 더욱 그러하다. 월계단과 황보 인의 묘도 아직까지 향토 유적으로 지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유적지임을 알려주는 안내판조차 하나 없다. 

 

정헌호 (역사교육전문가)    


신문협동조합「파주에서」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